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평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950년 3월,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의 검교 태사 겸 [[시중]]을 역임하던 [[곽위]]는 황제 [[유승우(후한)|유승우]]의 시기를 받아 암살 위협을 받자 반란을 일으켜 유승우를 죽였다. 이후 [[유빈(오대십국시대)|유빈]]을 일시적으로 황제로 세웠다가 951년 유빈을 폐위한 뒤 [[후주]]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이에 산서성 태원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유민(북한)|유민]][* 후한 초대 황제 [[유지원]]의 친동생이다.]이 반발하여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을 건국하고 후주와 적대했다. 그러던 954년 2월 17일, 곽위가 숨을 거두었다. 그의 친족은 유승우에 의해 몰살되었기 때문에, 처조카인 [[시영]]이 뒤를 이었다. 유숭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해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후주를 칠 준비에 착수하면서, 사자를 파견해 [[요나라]]에게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요나라에서는 무정절도사 겸 정사령인 양곤을 파견하여 1만여 기병을 이끌고 진양으로 가게 했다. 유숭은 스스로 3만 군대를 일으켜 의성절도사 백종휘를 행군도부서로 삼고, 무녕절도사 장원휘를 전봉도지휘사로 삼아서 요군과 더불어 단백에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노주로 향했다. 북한군이 양후역에 주둔하자, 소의절도사 이균은 휘하 장수 목령균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2천을 거느리고 맞아 싸우게 한 뒤,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태평역에 성을 쌓았다. 장원휘는 목령균과 싸우다가 짐짓 패한 척하며 북쪽으로 후퇴했다. 목령균은 이를 추격했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했고, 천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균은 이 소식을 듣고 상당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영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려 했다. 이에 여러 신하가 반대했다. >"유숭은 평양에서부터 도망한 이래로 세력은 쭈그러들고 기운도 막혀서 반드시 감히 스스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새로 즉위하셨고 산릉을 만드는데도 날짜가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동요될 것이니, 의당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되며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막게 해야 합니다." 시영이 답했다. >"유숭은 우리가 대상(大喪)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짐이 나이가 어린데 새로 세워졌다고 가볍게 보면서 천하를 먹어치우려는 마음을 가졌다. 반드시 스스로 왔을 것이니, 짐이 가지 아니할 수 없다." 대신 [[풍도(오대십국시대)|풍도]]가 반대 의견을 계속 피력하자, 시영이 말했다. >"옛날에 당 태종은 천하를 평정하면서 일찍이 스스로 가지 않은 적이 없는데, 짐이 어지 구차스러운 편안함을 행하겠소?" 풍도가 말했다. >"폐하께서 능히 당 태종처럼 될 수 있는지 아직은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시영이 말했다. >"나의 병력이 강함을 가지고 유숭을 깨뜨리는 것은 마치 산으로 달걀을 누르는 것과 같을 뿐이오." 풍도가 말했다. >"폐하께서 산과 같이 될 수 있는지는 아직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시영은 기뻐하지 않았지만, 왕부가 가기를 권고하자 이를 따랐다. 3월 3일 천웅절도사 부언경에게 조서를 내려서 군사를 이끌고 자주의 고잔에서 북한군의 후방으로 나아가게 하고, 진녕절도사 곽숭으로 부사를 맡게 했으며, 하중절도사 왕언초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이끌고 진주의 동북쪽으로 나아가서 북한군을 맞이하게 하였고, 보의절도사 한통에게 그의 부사를 맡게 하였고, 마군도지휘사 겸 녕강절도사 번애능, 보군지휘사 겸 창회절도사 하휘, 의성절도사 백중찬, 정주방어서 시언초, 전 요주단련사 부언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택주로 향하게 하고, 선휘사 향훈이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3월 9일, 시영은 풍도에게 명령하여 재궁을 받들고 산릉으로 가게 하였고, 정인회를 동경유수로 삼았다. 3월 11일 대량을 출발하여 화주에 도착하여 북한군과 곧 맞붙으려 하였다. 이때 공학도지휘사 조조(趙晁)가 사사롭게 통사사인 정호겸에게 말했다. >"도적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성하니 의당 진중함을 유지하여서 그들을 좌절시켜야 할 것이오." 정호겸이 이 말을 시영에게 전하자, 시영이 화가 나서 말했다. >"네가 어찌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가? 반드시 다른 사람이 시킨 것이니, 그 사람을 말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정호겸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시영은 조조와 나란히 주옥에 가두었다. 이후 3월 18일 택주를 지나 주의 동북쪽에서 묵었다. 한편 유숭은 시영이 친정했다는 걸 알지 못하고 노주를 압박하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평의 남쪽에 진을 쳤다. 3월 19일 선봉대가 북한군과 교전한 후 북한군이 물러나자, 시영은 그들이 달아날까 염려하여 군대를 재촉하여 급히 나아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고평 전투의 막이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